타블로 미안

타진요 사태 때 타블로를 의심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무책임하게 글(타블로 논란을 지켜보면서)을 싸질렀지. 어쨌든 타블로 미안해. 보이는 게 다가 아닌데 그땐 내가 미욱했었나봐. airbag 샀으니 화 풀어.

by 디제이 | 2011/10/16 02:51 | 끄적끄적 | 트랙백(1) | 덧글(2)

사람의 생각에 우위가 없다...

오래 전에 담아뒀던 건데 지금도 내게 필요한 말. 아니 언제나 되새겨야 할 말. 아무래도 난 아직 덜 큰 거 같다.


“재단하려는 것이다. 집집마다 가훈이 있다. 하지만 그것의 등수를 매길 수 없다, 건방진 생각이다. 사람의 생각에 우위가 없는 것이다. 모든 가치관은 중요하다. 그 사람의 역사가 반영된 것이기 때문에 타인에게 ‘가치판단이 미숙하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그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 그렇지 않은 ‘선민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그런 사람들이 사회를 어렵게 만든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흑백논리를 가지면 훨씬 위험지는 것이다”.


안철수가 추격성장기의 '성과주의'를 비판하며 (시골의사 박경철, '안철수 박사'의 리더십에 관해)

by 디제이 | 2011/10/16 02:32 | 끄적끄적 | 트랙백 | 덧글(0)

그대가 존재하는 한 - 그대를 사랑합니다 (2011)


사랑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않다. 사랑은 대개 젊은 사람들의 차지다. 인기가요 노랫말이나 '본방사수' 드라마에선 사랑이 차고 넘치는데, 그 사랑의 주인공 중 열에 아홉은 새파랗게 젊은 사람들이다. 사랑을 붙잡기 위해 그의 집 앞에서 꺽꺽대며 울거나 떠나간 사랑이 돌아오길 바라며 며칠씩 식음을 전폐하는 레퍼토리는 젊은 사람들의 오래된 전유물이기도 하다. 사랑에 얽힌 젊은 시절 설화를 두고, 그때만큼 순수하고 예쁜 사랑을 한 적은 없었노라고 되뇌는 사람들이 시대와 세대를 막론하고 부지기수인 걸 보면 사랑은 젊은 사람들의 차지임이 분명하다는 인식은 굳어진다. 과연 사랑은 젊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던가?

확실히 대답하기 어려운 물음이지만, 우리는 적어도 사랑을 얘기할 때 그 사랑의 부분집합으로 노인들의 사랑을 집어넣진 않는다. 사랑의 주머니 안에 노인들의 사랑을 꾸역꾸역 우겨넣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 사람이 가리키는 노인들의 사랑이란 반평생 넘게 새끼를 낳아 기르고 희로애락을 함께 하며 닳아빠지게 된 황혼녘의 사랑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미운정 고운정' 다 들어버린 세월의 사랑 말이다. 그 사랑엔 멜로와 열정과 서사가 없다. 그저 하루가 다르게 그 기능을 다해 가고 있는 늙은 몸을 걱정하며, 서로의 안위를 보살펴 주려는 측은지심이 있을 뿐이다.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이렇게 닳아빠지게 돼, 이제는 측량할 수 없을 것 같은 노인들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노인들에게도 젊은 사람들의 사랑과 똑같은 형질과 무게의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의 깊이만으로 막장 드라마를 능가하는 풍부한 서사를 써내려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사랑이 전혀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은 속세의 조건 속에서 사랑이 어떻게 가능한지 인상적으로 포착해냈다. 할아버지의 부름에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봉양하라는 줄 알고 옥신각신하는 며느리들은, 치매에 걸린 아내가 할아버지 삶의 유일한 이유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또 이해할 수도 없다. 할머니가 없는 삶이 두려워 자살을 선택하는 할아버지를, 그네들이 도대체 어떻게 이해한단 말인가.

물론 이 영화의 이러한 강점은 이미 검증이 끝난 원작에 힘입은 바 크다. 씬 하나하나에 강풀 웹툰의 장면 하나하나를 그대로 포개어 이야기를 만들었다. 캐릭터를 잡아내는 배우들의 연륜과 역량을 포함해 이미 모든 준비가 갖춰져 배를 밀고 가기만 하면 됐다는 감독의 말은 그래서 틀린 말이 아니다. 이전 강풀 원작의 영화들이 원작에 충실하지 못해 힘을 못 썼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걸 보면, 원작을 하나의 물줄기로 잘 잡아낸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평가할 부분이 있다. 원작의 자잘한, 그렇지만 포기하기도 아까운 이야깃거리들을 과감히 쳐내고 중간 중간 감초들의 위트를 가미해 대중을 웃고 울릴 수 있는 확실한 기반을 완성해 낸 셈이다.

하지만 또 원작에 충실한 탓에 아쉬운 구석도 없지 않다. 성질이 불같아 욕을 달고 사는 욕쟁이 할아버지와 한없이 순수한 마음을 지닌 파지 줍는 할머니의 연정은 다소 작위적인 면이 있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더러 넘치도록 동화적으로 각색한 구석도 엿보이고 그런 할머니를 물심양면 돌보는 할아버지의 삶에선 온화한 미소만 가득할 뿐 주름은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곁에서 맞이하는 게 두려워 몇 십 년 만에 고향으로 내려가게 된다는 설정도 설득력이 약하긴 마찬가지다. 감동을 주기 위한 작위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여전히 고개를 끄덕이게 했던 노인들의 애달픈 사랑은 이 부분에 이르러 새하얗기만 한 동화가 돼 버리고 만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노인들 또한 '사랑한다'는 자연의 섭리를 능숙하게 그려냈다. 그게 이 영화의 가장 큰 묘미이자 성취다. 이제는 앞의 물음에 답할 수 있겠다. 과연 사랑은 젊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던가? 그렇지 않다. 사랑은 젊어서나 늙어서나 언제나 가능하다. '그대'가 존재하는 한 말이다.

by 디제이 | 2011/03/02 23:31 | 끄적끄적 | 트랙백 | 덧글(0)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은 사랑일지니 - 시라노 연애조작단 (2010)

성경에서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다. 믿음과 사랑을 저울에 올려놓고 그 무게를 잴 수는 없겠지만 사람들은 이런 성경 말씀 탓인지 대체로 사랑을 제일로 친다. 시라노 연애조직단은 이 당연한 듯 보이는 속세의 이치를 몸소 체현한다. 사랑하는 이의 믿음을 저버렸다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일부러 사랑을 떠나보낸 후, 현대판 시라노가 되어 '생계'를 잇다 사랑이 제일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전체 이야기 줄거리는 다소 촌스러운 구석이 있지만, 현실보다 장르에 초점을 맞춘 영화의 의도를 고려해 봤을 때 이해해 줄 만하다.

하지만 믿음보다 사랑이라는 메시지 자체는 칼로 물을 가르는 허황된 시도 같다. 믿음과 사랑을 구분하는 게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사랑의 구성 성분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또 사랑 안에 믿음이 포함돼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누가 누구랑 잤느냐가 연인 사이에선 굉장히 중요한 화두다. 사랑은 한 사람하고만 가능하기 때문에, 바람둥이가 제 버릇 개 못 주고 연인이 아닌 누군가와 잤다면, 여태까지 나눴던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게 되고 그들의 사랑은 휴짓조각이 돼 버린다. 그러니까 믿음과 사랑은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일란성 쌍둥이인 것이다.

차라리 시라노에게 편지를 대필하도록 해서라도 사랑을 쟁취하고자 한 크리스티앙에게 초점을 맞춰, 그의 사랑 또한 시라노 못지 않게 무거운 사랑이었음을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진정한 후자의 맛을 보여줄게." 배잡고 웃었다. 송새벽과 권해효의 감초 연기가 빛났다.

by 디제이 | 2010/12/11 01:43 | 끄적끄적 | 트랙백 | 덧글(0)

예비군 6년차 안보교육을 받다 알게 된 사실.
꾸벅꾸벅 졸다가 심봉사마냥 갑자기 눈이 번쩍 뜨였는데, 그때가 바로 괄약근이 가스를 배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몇 년 전 토익 리스닝 테스트 때 깊은 산골 고요한 옹달샘의 정적을 깨는 웅숭깊은 방귀를 뀐 적이 있는데, 아마도 그게 트라우마가 돼 '킥'으로 살아돌아 온 듯.

by 디제이 | 2010/10/23 03:32 | 끄적끄적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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