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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변찮은 이유
요즘 친구들에게 노무사 시험을 준비하는 이유에 대해 밝힐 기회가 제가끔 있습니다. “노무사, 그거 먹는 거야?”라고 우스개 소리하는 녀석에겐 노사관계 조정자라고 운을 떼며 구구절절이 레퍼토리를 읊고, 노무사라는 직업 자체에 진지하게 호기심이 인 녀석에겐 그저 먹고 살만한 직업 같다고 넌지시 얘기해주곤 하죠. 답변 태도가 뒤바뀐 게 아니냐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노무사가 되면 그럭저럭 입에 풀칠할 순 있겠다는 생각에서 저는 이 바닥으로 은근슬쩍 흘러들어 왔거든요. 다시 말해 제가 노무사를 공부하는 일차적인 이유는 딱히 노무사 외에 더 나은 밥벌이 수단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노사관계 조정자라니요, 제 사전에 그런 허울 좋은 말은 없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세상에 이렇게 무책임한 말도 없습니다. 실패는 실패일 뿐입니다. 제가 몇 년간 기를 쓰고도 결국 성공의 기쁨을 맛보지 못한 건, 두 가지 이유일 겁니다. 그 직업이 적성에 맞지 않았거나, 아니면 더럽게 운이 없었거나. 이유가 어쨌든(이제는 궁금하지도 않은 그 불합격 사유) 저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내일 모레면 계란 한판 나이가 되는, 그러니까 이제는 밥벌이할 나이가 한참 지난 백수의 입장에서 여전히 사람 노릇을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은 때때로 생의 존재 이유를 송두리째 부정하곤 하더군요. 조금 과격한가요? 하지만 무산계급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는 서민에겐, 무엇보다 먹고 사는 문제가 삶의 어젠더임엔 틀림없을 겁니다.
실패했다고 질질 짤 시간도 없어 바로 취업사이트에 가입해 이곳저곳을 알아봤습니다. 세상에, 몇 시간이 안 돼 숨이 턱 막히더라고요. 중고등학교 때 풀던 수학문제를 잠시라도 들여다봐야 겨우 적성검사라는 장벽을 넘을 수 있다네요. 대중 앞에서 썰을 풀 수 있는 말주변이라곤 쥐뿔도 없는데 PT면접도 통과해야 한답니다. 더구나 마지막 임원면접에서 영어회화 면접이 암약하고 있다는 소릴 듣곤 까무러칠 뻔 했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다들 그런 지난한 과정을 밟고 취직하고 있는데, 저만 용가리 통뼈 행세를 할 수도 없고. 툴툴된다고 상황이 나아질 게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제 자신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부러 제 앞에 섹시하게 깔린, 갈림길 없는 고속도로를 타고 일방통행 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로 인해 고속도로에선 종종 탈선 사고가 벌어지나 봅니다. “노동조합이 과연 필요할까요?”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때에 따라 필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꼼수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어느 지원자는 임원이 요구하는 ‘정답’을 말하지 못한 탓에, 임원면접 전까지 최고점수를 받았음에도 그만 불합격하고 말았습니다. 임원의 그 천박한 인식은 둘째 치고, 어쩔 수 없이 개인은 조직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번뜩 들더군요. 그렇다고 순진하게 조직 없는 유토피아를 바라는 건 아닙니다. 다만 나를 ‘인적 자원’으로 바라보는 조직의 그 따가운 시선에 내 한 몸을 맡길 수 있느냐, 이건 또 별개의 문제 같습니다. 물론 인사관리에서 배운 바대로 개인과 조직의 성장을 일치시켜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자꾸 ‘모던 타임즈’의 찰리채플린이 떠올라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되더라고요. 컨베이어 벨트의 부속품이 돼 기계가 나인지 내가 기계인지 도통 감을 못 잡던 그 처량한 찰리채플린이. 오로지 취직이란 이정표만 덩그러니 놓인 고속도로에서 슬며시 탈선을 감행하게 된 건 그래서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먹다 버려 이 바닥으로 흘러들어 온 개뼈다귀 하나가 살짝 실례를 했습니다. 노사관계 조정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가졌거나, 나아가 초심님처럼 노무사가 사회적 약자를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여겼던 분들에게 제가 변변찮은 이유를 들어 찬물을 끼얹은 셈이니까요. 조직의 일원이 되기 싫다는 다소간 철없는 욕망, 어떡해서든 밥벌이 수단을 찾아보려는 생존 욕구는 아무리 같잖은 변명을 들이대도 겨우 매슬로우의 저차원적 욕구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동조합이 필요 없다고 여기는 임원처럼 제 인식이 그렇게 천박한 건 아닙니다. 변변찮은 이유를 들어 노무사 시험에 도전하는 셈이지만, 저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아마도 그 마음은 단지 무산계급으로써의 동류의식에서 나온 싸구려 연민 수준은 아닐 겁니다. 견결한 사회주의자는 아니지만, 응당 사회적 약자가 더 살만해져야 한다는 상식 정도는 갖고 있거든요.
그래서 변변찮은 이유지만, 쌍욕을 하면서도 이렇게 노무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네요. ㅎㅎㅎ
# by | 2008/12/15 01:00 | 골방수험일기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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