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리어의 세계, 현실의 세계

헐크호간과 양대산맥을 이뤘던 WWF프로레슬러 중 한 명.

  헐크호간이 자신이 입고 있던 노란 티을 찢으며 괴력을 뽐냈다면, 워리어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링을 이리저리 뒤흔들며 성난 인디언 흉내를 냈다. 분노가 폭발했음을 만방에 알리고 상대방에게 사망선고를 내리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는 단 한 번도 진적 없는 헐크호간을 이겨버린 유일한 사내였다. 헐크호간 빠돌이들 모두 그의 패배를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난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몇 안되는 영웅 리스트에 그의 이름을 추가했다. 그가 불의를 참지 못하고 동물적 감성을 표출하며 정의의 사도로 분할 때, 자연스레 그에게 감정이입된 나 역시 온집안을 돌아다니며 눈에 보이는 것들을 뒤엎어 버렸다. 그와 함께 전율을 느끼고자 했던 것이다.

  프로레슬링이 현실이 아님을 깨닫기 전까지, 울티밋 워리어가 신나게 뛰어노는 프로레슬링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한 아이에게 진정 하나의 '세계'로 다가왔다. 그 세계에 선과 악은 분명했다. 워리어와 헐크호간이 우리를 지켜주는 경찰이라면 '빅보스맨'과 '자인언츠'는 약탈과 강도를 일삼는 천하의 악당이었다. 선과 악은 명확히 구분돼 극명하게 대립했다. 따라서 나같이 프로레슬링에 빠져사는 아이들의 선택사항은 뻔했다. 선을 선택해 악을 응징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선택하는 유일한 모범답안이었다.

  그러나 프로레슬링 '세계'가 사실 수준급 배우들로 구성된, 환상과 모험의 어린이용 '드라마'였음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가 직접 맞대고 있는 현실'세계'가 슬금슬금 다가온다. 이곳에는 우리의 예전 '드라마'와 같은 권선징악적 결말이 없다. 선악이 구분되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모범답안이 없이 부유하는 이따위 세계에서 우리는 겨우 가진 자와 정치하는 자와 힘있는 자를 가려내 욕지거리를 해댈 뿐이다. 그렇게 버겁게 살아낸다.

by 그냥 | 2008/10/10 00:35 | 끄적끄적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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