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진보신당
2009년 10월 30일
선거 풍경
선거운동이 시작되던 첫 날, 임종인 사무실에 전화를 건 뒤 직접 찾아갔다. 그런데 지난 총선 때 임종인 후보와 유세 차량을 타고 다니며 선거운동을 돕던 젊은이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 모습이 너무 부러워 보여 이렇게 자원봉사자로 나서게 된 건데, 내 또래는 민노당원 단 한 명 밖에 없었다. 왠종일 중년의 아주머니, 아저씨들에 둘러싸여 있자니 회춘한 느낌도 들었지만, 뻘쭘한 상황이 시시각각 벌어지곤 했다. 다행히 며칠동안 계속 들락날락거리니 많은 분들이 젊은이가 고생한다고 알아봐 주시고 격려해 주셨다. 막판엔 내집처럼 편안하기까지 했으니 인간은 정말 적응하는 동물인가보다.
2.
둘째날부터 월피동을 담당하던 민노당원 여성 한 분과 함께 일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시의원에도 도전해 봤다고 하더라.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는데 역시나. 운동권에서 활동하는 여성의 당차고 시원스런 목소리였다. 물론 이건 학창시절 운동권에 아주 잠깐 발을 담갔던 내 인상 깊었던 경험에 근거하고 있고, 어쩌면 편견일 수도 있겠다. 그 분은 사람을 대할 때 진심으로 대하려 노력했고, 남을 배려할 줄 알았으며, 상대방의 입장에서 얘기하고 어떻게 남의 얘기에 귀기울여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선거에서 졌지만 좋은 경험이 됐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전적으로 그 분 덕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서, 좋은 사람의 좋은 행동을 눈 앞에서 보게 돼 기쁘다.
3.
선거운동 기간 막바지엔 주로 잠재적 지지층에 전화를 걸어 한 표를 호소했다. 대부분은 귀찮아 했고, 일부는 화를 내며 다신 전화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던지 말던지. 난 다시 수화기를 들어 번호를 꾹꾹 눌렀다. 잠깐 동안 전화 영업을 해 본 경험 탓인지 마음의 상처쯤이야 홀가분히 날려버릴 수 있었다. 마인드 콘트롤을 할 수 있었다고 할까. 나중엔 전화 거는 기계가 됐다. "안녕하세요. 임종인 선거사무실입니다. 늦은 시간에 전화드려 정말 죄송하고요. 다름이 아니라 10월 28일에 우리 상록을 지역구에서 재선거하는 거 아시죠? 블라블라..."
4.
당연히 상록을 지역구에 사는 친구 몇 명에게도 전화를 걸어, 이번엔 내가 마음 놓고 무조건 임종인을 찍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아니 사실 선거법을 위반하며 선심성 선거운동을 했다고 할까. 임종인이 당선되면, 채권채무관계가 있는 친구에겐 빚을 까주겠다고, 주말마다 공놀이를 같이 하는 놈들에겐 맛난 걸 사주겠다고 얼르고 달랬다. 선거운동을 도와주면 너한테 좋을 게 뭐냐고 따져 묻는 이에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그냥 얼버무리고 말았다. 거창하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꼭 도사연할 거 같아서. 거창하게 말하지 않고도 이해시킬 수 있는 사람이 부럽다.
5.
민노당, 진보신당 당원들과 밥 먹을 기회가 두 번 정도 있었던 것 같다. 진보정당의 당원답게 그들의 생각은 진보적이었다. 하지만 가끔 불편한 순간이 언뜻언뜻 찾아왔다. 생각은 진보적이었지만, 말은 드문드문 불필요하게 현학적이었고 그래서 현실과 괴리된 채 대부분 쓸데없는 쓰레기가 되고 말았다. 진보적이라고 꼭 그렇게 말할 필요까진 없는데 말이다. 보수정당과 이명박 정권에 대한 비이성적인 분노도 신경에 거슬렸다. 나 역시 핸드폰 바탕화면이 "MB DIE"지만 어디까지나 유머일 뿐이고, 공석에서나 사석에서나 말을 가려서 한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해 자신의 삶을 직접 바꿔보겠다는 이들의 노력은 박수 받아 마땅하다.
6.
안산 상록을이 정치 1번지가 된 탓에 네임 밸류가 있는 브랜드 의원들의 연설을 한 곳에서 들을 수 있는 호사를 누렸다. 역시 직업 정치인들이라 술술술 말이 나왔고, 그 말이 솔솔솔 귀에 와 박혔다. 그러한 말의 성찬 속에서도 민노당 이정희 의원의 연설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연설의 콘텐츠야 다른 정치인과 별반 차이가 없었지만, 약간씩 떨리는 음색이 슬금슬금 가슴으로 기어들어왔다. 의도했건 의도치 않았건 그 살 떨리게 하는 음색은 어느새 진심이 담긴 연설이라고 내 가슴을 설득하고 있었다. 적어도 나만 그런 느낌을 받진 않았을 게다. 이정희 의원은 천상 정치인의 기질을 타고난 게 아닐까.
7.
선거 다음날 임종인 의원에게 문자가 왔다. 따로 문자를 주고 받는 사이라면 좋으련만, 그렇게 내밀한 관계는 아니고. 아마도 선거운동 기간 동안 사무실에서 한번쯤 손을 맞잡고 승리를 기원하곤 했던 모든 자원봉사자에게 단체 문자를 보낸 모양이다. "큰 성원 감사드립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임종인 올림" 자원봉사자의 헌신에 감사를 표하는 평범한 문자였지만 왜 이리 슬퍼 보이는지. 바로 답문을 보냈다. "2년 뒤 다시 자원봉사자로 뛰겠습니다. 하루쯤 슬퍼하시고 내일 털고 일어나세요. 이제 절차탁마 하셔야죠. 홧팅" 어떤 위로의 말도 쉽사리 위로가 되지 않겠지만, 할 일이 많은 사람은 곧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일어나는 법이다.
# by | 2009/10/30 04:14 | 끄적끄적 | 트랙백 | 덧글(0)
2008년 11월 15일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는 법 (공산당 선언, 강유원)

『공산당 선언』, 강유원 (0609)
동트는 새벽 밝아오면 붉은 태양 솟아온다. 피맺힌 가슴 분노가 되어 거대한 파도가 되었다. 백골단 구사대 몰아쳐도 꺾어 버리고 하나 되어 나간다. 노동자는 노동자다.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진짜 노동자. 너희는 조금씩 갉아 먹지만 우리는 한꺼번에 되찾으리라. 아~ 우리의 길은 힘찬 단결투쟁뿐이다.
- 단결투쟁가 -
새내기 시절, 멋모르고 선배 손에 이끌려 집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 그리고 단결투쟁가를 불렀다.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진짜 노동자~” 무슨 생각으로 목청을 돋우며 ‘팔뚝질’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를 회고해보면 난 대학생이 되어서도 여전히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애였던 것 같다. 세상의 진보는 얼어 죽을, 노동자와의 연대는 그저 흰 소리. 대학생들이 노동자 옆에서 ‘팔뚝질’을 하는 게 도움이 된다니 그냥 그러려니 했을 뿐이다. 사실 도로를 점거하고 팔뚝질을 하는 게 젊은이의 치기 어린 생각엔 멋져 보인 부분도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머리가 조금 커진 뒤, 난 어느새 ‘팔뚝질’을 아직 철이 덜 든 사람이나 하는 행위로 치부하게 됐다.
하나 조직으로부터 한 달 월급을 받고 생활하는 모든 사람은 노동자란다. 요즘 세상에 어디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부러 내 생각은 틀렸다. 아직 철이 덜 든 사람이나 ‘팔뚝질’을 하는 게 아니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 외엔 모두 팔뚝질을 해야 한다. 이렇게 자신을 노동자로 인식하는 일,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내가 사회에서 어떤 신분으로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지 알아야 어떻게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법이니까.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의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구절이 생각난다. 난 4년제 대학을 졸업했으니 아무래도 양복을 입고 사무실에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릴 가능성이 높을 게다. 다행히도 화이트칼라에 속할 테니 가슴을 쓸어내려도 되는 걸까? 어림도 없다. 블루칼라로 명명된 사람들이 작업복 입고 공장에서 스패너로 나사를 조이긴 하지만, 그래서 화이트칼라에 비해서 더 ‘저급’해 보이긴 하지만, 화이트칼라나 블루칼라나 위로부터 한 달 ‘녹봉’을 타먹긴 마찬가지다. 다 같이 노동자란 얘기다.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즉 노동자와 구분되는 사람은 자본가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 쉽게 말해 공장의 대지와 자동화 기계, 컴퓨터와 각종 소모품을 제 돈 들이고 갖고 있는 사람 말이다. 우리는 이 자본가가 수익을 낼 수 있도록 자본가의 집기를 빌려 자본가의 일을 대행한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피땀을 흘리며 말이다. 하나 자본가를 위해 열심히 일한 결과는 참혹하기만 하다. 노동자가 혼신의 힘을 다해 ‘한계’ 생산성을 달성하면, 자본가는 더 세련되고 효율적인 기계를 들여놓거나 아예 값싼 노동력이 있는 해외로 공장을 이전함으로써 노동자의 자리를 없애기 때문이다. 그 편이 한계 생산성을 달성한 노동자를 무리하게 쥐어짜는 것보다 자본가가 제 배를 불리기에 더 낫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말을 곱씹어 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본가는 자본 축적을 위해 국경을 넘나들며 시장을 개척한다. 다행히 아직 미개발된 시장의 사람들은 자본가로 인해 ‘파이’를 나눠 먹을 수 있다. 자본가가 그간 배를 곪던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입에 풀칠 할 수 있는 돈을 쥐어주는 탓이다. 하지만 시장의 ‘레드오션’은 피할 수 없다. 노동자의 업무를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첨단 기계를 들여오는 등 생산성 향상을 통해 수익을 높이려 해도 어느 순간 한계가 찾아오는 법이다. 그럴 때 자본가의 다음 행동은 불 보듯 뻔하다. 시장을 버리고 미 개척된 다른 시장을 찾아나서는 일. 다시 말해, 한계 생산성에 도달한 노동자는 일자리가 없어져 배를 곪게 되는 처음의 상황으로 되돌아가게 된다는 소리다.
이에 맞서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해야 할 텐데, 노동자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혁명의 길은 가망 없어 보인다. 적어도 노동자의 봉기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가 무너지는 풍경은 머릿속에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다. 먼저 자본주의의 생리를 파악하고 자본가를 제외한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이 노동자임을 인식하는 게 ‘단결’의 첫걸음이 아닐까 싶다. 단결의 공간은 헐겁지만, 이미 마련돼 있다고 본다. 진보신당 말이다. 진보신당에 한 표를 건네는 게 자신을 노동자로 인식한 사람들의 민의를 모아 ‘단결’하는 길 아닐까.
# by | 2008/11/15 00:50 | 끄적끄적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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